줄거리
자동차 회사의 리콜 심사관으로 일하는 주인공(Narrator: 에드워드 노튼 분)은 스웨덴 산 고급 가구로 집안을 치장하고 유명 메이커의 옷만을 고집하지만 일상의 무료함과 공허함 속에서 늘 새로운 탈출을 꿈꾼다. 그는 출장행 비행기 안에서 독특한 친구 타일러 더든(Tyler Durden: 브래드 피트 분)을 만난다. 잘생긴 외모와 파격적인 언행의 타일러는 자신을 비누 제조업자라고 소개하며 명함을 건낸다. 집에 돌아온 주인공은 자신의 고급 아파트가 누군가에 의해 폭파 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무기력해 진다. 갈 곳이 없어진 주인공은 타일러에게 전화하여 도움을 청한다. 이때부터 주인공은 공장지대에 버려진 건물안에서 타일러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타일러는 낮에는 자고 밤에는 극장 영사기사와 웨이터로 일하는데 틈틈히 고급 미용 비누를 만들어 백화점에 납품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어느새 타일러의 카리스마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타일러는 주인공에게 자신을 때려달라고 부탁한다. 사람은 싸워봐야 진정한 자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가해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게 되고 폭력으로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정화 시키겠다는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게 된다. 결국 이들은 매주 토요일 밤 술집 지하에서 1:1 맨주먹으로 격투를 벌이는 파이트 클럽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파이트 클럽의 명성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켜 대도시 마다 지부가 설립되고 군대처럼 변해갔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파이트 클럽을 보고 주인공은 당황하게 되고 주인공의 정신적 지주였던 타일러가 갑자기 사라지자 타일러를 찾기 위해 각 도시를 헤매던 주인공은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스릴러 영화의 대가라고 해도 좋을 데이비트 핀처 감독의 1999년 작품이다. 이 감독의 영화 대부분이 그렇듯 느와르적 요소가 다분한 영화이기도 하다. 일단, 처음에는 약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말하자면 재미가 없었다. 영화 앞부분만 보기를 3번째가 되는 회차에 진득하게 앉아 보자고 작심했기 때문에 봤지 아니였다면 보는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폭력적이거나 피가나오거나 하는 영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보기가 더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늘 그렇듯 헬레나 본햄 카터의 연기는 극도에 치달아 있었고 브래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튼의 상반되는 캐릭터가 치고 받으면서 생기는 분위기에 심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 테일러 더든은 계속해서 질문하고 도전한다. 결국엔 답이 없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하고 있는 질문은 아마도 진실되게 살고 있는가? 당신의 인생은 당신만을 위한 것인가?로 압축된다 생각한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테일러 더든은 영상을 이어 붙이면서 생기는 현상을 설명을 해주고 자신만의 시그네쳐를 위해 성적인 장면을 1프레임씩 첨가하는 장난을 친다고 했다. 갑자기 왜 이런 부분이 강조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설명이 나오기 이전 부터 영화를 보면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파일이 깨진 것인가 생각했지만 이 부분에서의 설명을 들은 후 그 화면들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고 특히나 마지막 부분에 남자의 성기가 크고 확연하게 보이기 까지도 했다.
스릴러를 좋아 하면서도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 볼때는 심각하고 뒤통수를 치지만 그것 뿐이고 기분도 가라앉는다. 그런면에 있어서 데이빗 핀쳐 감독의 영화들은 성공적인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해 또 다른 인물을 만들어내고 자신과는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내면의 나를 동경하는 것은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려서는 스스럼 없이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부담이나 거부가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이를 먹고 소위 교육이라는 것을 받게 되면 잘잘못에 대한 기준을 배우게 된다. 초등학교에서는 바른 생활을 배우고 중학교에서는 도덕을, 그리고 고등학교에서는 윤리라는 과목을 통해 마땅히 해야 할 것들과 해서는 안되는 것들에 대해 구분짓도록 교육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모두 소극적인 사람이 될수밖에 없는 환경을 갖게 된다. 아무리 개성이 강하고 무대뽀인 사람일지라도 타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이라면 그 안에 속하고 싶다라는 욕망은 당연히 가진 것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나의 관계,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갖는 생각에 대한 고민은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 부담감을 어떻게 견뎌내느냐에 대한 방법과 능력이 다시 사람을 구분짓게 된다. 파이트 클럽에서 남주는 그 부담을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케이스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할 것이다. 다시, 가치판단의 기준을 정립한 사회는 무너진 사람들을 정신이상자라고 부르며 병자 취급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가진 문제점이 어느 누구에게 조금 더 도드라진다고 해서 누구는 정상이고 누구는 비정상이다라고 결정지을 권한이 누구에게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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